<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씨앗을 뿌리는 사람 역간)에서 호빗들이 노령의 나무수염에게 누구의 편이냐고 묻자 나무수염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전적으로 누구의 편도 아니다. 누구도 전적으로 내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절대로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대상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비유 속에 비슷하게 나와 있다. 그분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의 편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편도 아니지만, "종교적 도덕주의"를 특히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꼽으신다.
기독교가 세상에 처음 출현했을 때는 종교로 불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기독교는 당시에 종교가 아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 당시 이웃들이 던졌을 질문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이 "당신네 신전은 어디에 있소?"라고 물으면 그리스도인은 신전이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당신네 제사장들은 어디서 일하는 거요?" 그리스도인은 제사장도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웃들은 바로 되물었으리라, "당신네 신들을 기쁘게 하는 제사는 대체 어디서 드린다는 거요?" 그리스도인은 제사도 더는 드리지 않는다고 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성전을 종식시키는 성전이셨고, 모든 제사장을 종식시키는 제사장이셨으며, 모든 제물을 종식시키시는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영적 실체가 워낙 특이해 세상의 여타 종교와 함께 분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과 아버지가 나오는 비유를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을 무신론자라 부르는 게 지극히 당연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문화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는 그 아이러니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종교이고 도덕이다.
기독교의 반대 개념은 (일부 세계 종교를 제외하고는) 다원적 세속주의뿐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는 제3의 존재요 전혀 다른 무엇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긴 반면 종교나 도덕을 준수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그분께 매료되고 마음이 끌렸다. (신약의 전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교적인 사람보다는 소외된 사람과 더 친밀함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과 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눅7장 참조), 종교적인 사람과 인종적으로 소외된 사람(요 3-4장 참조), 종교적인 사람과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눅19장 참조)을 만나실 때면, 소외된 사람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지만 '형'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 끌렸던 부류의 외부인들이 현대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다. 가장 전위적인(avant-garde)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그 의미는 하나뿐이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다음 글에서 나눕니다.
<탕부 하나님>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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