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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글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by 쏘울프랜드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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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

팀 켈러 목사님의'탕부 하나님'에 실린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페이지의 제목'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입니다. 

 

저자는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도 두 부류가 예수님의 주위를 맴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 주위를 맴돌던 두 부류의 사람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있다. 이 들은 비유 속의 '동생'(둘째 아들)에 해당한다. 그들은 도덕법도 정결의식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다. 동생처럼 그들도 바람직한 사회와 가정의 전통 윤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했다' 

 

두번째 부류의 청중은 비유 속의 '형'(맏아들)으로 대변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자라면서 배운 전통 윤리를 지켰다.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했다. 충실히 예배하고 꾸준히 기도했다. 

 

그들은 계속 그분께로 모여들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분개했다. "예수는 어떻게 이런 죄인들에게 다가가는가?" 이 죄인들은 우리의 예배에 생전 나오는 법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죄인들이 좋아하는 말만 해 줄 것이 다면서 분노했다. 

 

두 아들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예수님은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애초에 그들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이 비유가 나왔다. 두 아들의 비유는 형의 영혼을 예의 주시하다가 그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 이야기의 과녁은 돌아온 둘째 아들처럼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 아니라 매사에 성경의 규정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부도덕한 외부인이라기보다 도덕적인 내부인이다. 

 

그분은 그들이 눈멀고 편협해 스스로 의로운 줄로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삶까지고 멸망에 빠뜨리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셨다. 

 

예수님은 타락한 동생들에게 그분의 무조건적 사랑을 확신시켜 주려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범주를 허무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죄, 구원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

예수님의 이야기는 동생의 해로운 자기중심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형의 도덕주의적 삶도 가차 없이 질책한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사람이나 종교를 등진 사람이나 둘 다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다.

 

그 둘 모두 삶의 길도 양쪽 다 막다른 골목이며, 하나님과 맺어지는 법에 대해서도 인류가 품어 온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도 '형'부류의 사람들과 '동생'부류의 사람들은 양쪽 다 우리와 함께 있다. 

같은 사회안에 있고, 종종 한 집안에도 있다. 어느 집이든 대체로 맏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하고 책임감 있게 부모의 기준에 따른다. 

 

동생은 반항하는 경향이 있어 차라리 자유인이 되어 친구들 틈에서 인정 받으려 한다. 맏이는 자라서 전통적인 직장을 잡고 부모의 근처에 정착하지만 동생은 비록 허름한 월세방에 살더라고 집에서 멀리 떠나 화려한 도시를 추구한다. 

 

근대 이후로 더 두드러지게  등장한 두 아들의 모습.

19세기 초에 산업화의 여파로 부상한 신 중산층 부르주아 계급은 근면한 노동 윤리와 올바른 도덕성으로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경직성이 감지되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헤미안 공동체들이 출현했다. 

 

앙리 뮈르제의 영향을 받은 1840년대의 파리, 런던의 블룸즈버리 그룹,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비트 세대, 오늘날 록 인디밴드의 모습들이 다 그런 예다. 보헤미안들은 인습에서 해방되는 개인적 자율을 중시한다. 

 

현대 사회의 소위 문화 전쟁도 상충되는 기질 내지 충동의 재현이다

요즘은 종교가 없거나 아예 종교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도덕적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것이라고 여기는 그들은 , 타인의 삶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기관을 무조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반면에 이런 세속 정신의 발흥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 보수적인 정통 종교 운동들도 상당한 성장세를 보여 왔다. 

 

많은 사람이 도덕적 상대주의의 맹공에 경각심을 느껴 '문화 탈환'을 위해 뭉쳤는데 그들이 '동생들'을 보는 시각은 바리새인들 만큼이나 배타적이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나는 어느 편에 속했는가?

스스로 이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예수님 앞에 나왔는가? 나는 '맏아들'인가? 아니면 '둘째 아들'인가?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누구의 편이실까

다음 글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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