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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글

계산하지 않는 사랑법

by 쏘울프랜드 202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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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뒤에서 떠오르는 슈퍼문

'잃어버린 둘째아들'과 '잃어버린 맏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는 짧지만 충격적인 요청으로 막이 오른다. 

 

이 '잃어버린 아들들'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나는 어느 편에 속한 사람일까? 자문해보고 답을 내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같아 보인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도 그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대응을 했을까?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태도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15:12)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은 최초의 청중은 이런 요구에 경악했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아버지 사후에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그 권리는 아버지의 사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지금 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무엄한 행위였다.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의 재산만 원할 뿐 아버지는 싫다는 뜻이었다.  살아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제 내 몫을 넘겨 주시지요"ㅡ>우리의 모습에도 이런 태도가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보다 더 충격적이다. 

당시에는 고도의 가부장 사회였으므로 어른들, 특히 부모에게 품는 경의와 존경이 더없이 중요했다. 이 상황에서 중동의 전통적인 아버지가 의당 보일 반응이란 아들을 호되게 혼낸 뒤 집안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러기는 커녕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눅15:12) 이 의미를 이해하려면 본문에 "살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비오스'가 본래 '생명'을 뜻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굳이 재산을 지칭하면 더 구체적인 단어를 쓸 수 도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에는 사람들의 정체성 자체가 장소와 땅에 매여 있었다. 

 

땅의 일부를 잃으면 곧 자아의 일부를 잃고 지역사회 내에서 지위가 뭉텅 잘려 나갔다. 결국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은 아버지 목숨을 찢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 그대로 해 준다.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청중은 대부분 중동의 가부장에게서 그런 식의 반응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아버지는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뿐 아니라 처참한 명예훼손까지 참고 견딘다. 

 

대게 우리는 사랑을 거부당하면 화가 나서 복수한다. 거부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최대한 거둬들여 자신의 상처를 줄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을 줄곧 사랑하며 괴로움을 견딘다. 

 

'잃어버린 둘째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시된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도 얻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둘째아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끝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은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무조건 모든 사람을 수용하신다???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야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많은 주석가가 1막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 비유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속죄가 언급되지 않았다. 구주가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모든 사람을 수용하신다."라고.

 

예수님의 메시지가 그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여기서 내러티브를 끝내셨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지가 그게 아니기에 그분은 여기서 끝내지 않으셨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보여주셨다.

나는 어쩌면 탕자를 무조건적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고 하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다음 글에서 계속 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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