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타산하지 않는 사랑에 맏아들은 격노한다. 이제 그가 아버지를 욕되게 할 차례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잔치인 행사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맏아들과 말하려고 부득이 자리를 뜬 것은 대연의 주최자로서 체신이 깎이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타일러도 거절한다. 그가 이토록 격노한 이유는 무엇인가?
동생을 도로 집안에 들임으로써 아버지는 그를 다시 상속자로 삼아 (이미 확 줄어든) 가산의 3분의 1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 형의 계산으로는 이는 천만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큰 아들도 역시 아버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죽도록 일해서 내 몫을 벌었지만 그는 한 일이 없으니 번 것도 없어서 쫓겨나 마땅한 둘째 아들을 받아들여 오히려 그에게 다시 돈을 퍼주시니 도대체 정의는 어디로 간 겁니까?"라고 항변한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도 없으니 아버지에게 당당히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혼자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실 권리가 없다"라고 까지 항의한다.
당시 문화에서는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야 했는데 특히 남들 앞에서는 더했다. 그런데 맏아들은 "존경하는 아버지여"라 말하지 않고 그냥 "보소서"라고 한다. (헬라어 원문과 저자가 사용하는 NIV에는 29절 맏아들의 말 서두에 "보소서"가 있다.-옮긴이)
"이거 보세요!"와 같은 말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들이 자신의 책에 아버지의 치부를 다 폭로해 평생의 이력과 명예를 짓밟는 것과 같다.
깊은 상처를 입은 아버지는 어떻게 대응을 했을까?
맏아들의 공공연한 반항에 그 시대의 남자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자의 연을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이번에도 놀랍도록 자애롭다.
"아들아" 라고 그는 말문을 연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잔치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널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너라.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예상을 뛰어넘는 인자한 호소가 심금을 울린다.
이 위기의 집안은 다시 연합과 사랑으로 다시 뭉칠 것인가?
너그러운 아버지의 제의에 형의 마음이 누그러져 아버지와도 화해할 것인가? 우리의 머릿속에 이런 모든 생각이 스쳐 갈 그때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은 것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이 형들, 곧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게 메시지에 반응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 메시지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재 정의 하신다. 죄, 잃어버린 바 된 상태, 구원의 바른 의미를 알려 주시고자 함이다.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에서 발췌)
자식들이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
살아가면서 자녀가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담아낸 것이 "두 아들 이야기"이다. 두 아들에게 심한 상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도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아픔을 느끼실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식들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내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함을 깨닫게 하시려"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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