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죄'의 개념을 설명하신다. 형들이 하나님께 순종한 건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얻으려고 즉 그분을 닮고 사랑하고 알고 즐거워하려고 순종하는 게 아니다.
동생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정한다지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구주와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피할 수 있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죄를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덕적 비행을 사실상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도 가장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려진 상태일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내리신 '죄'의 정의
왜 그럴까?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아내려던 두 아들처럼.....
형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지한 게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 그분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구주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주주와 주인이 되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어기고 자기 기준대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지켜 극도로 착해지는 것이다.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다.
예수님은 세상을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가르지 않으신다. 그분이 보여 주시듯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력 구원 사업(project of self-salvation)에 몰두해 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쓴다. 방법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도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겨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지 즉 '복음'이 전혀 다른 영성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나 무종교, 도덕이나 부도덕, 도덕주의나 상대주의,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양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쯤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무엇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를 기뻐하신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것처럼 보이는 형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착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나쁜 사람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동생부류의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아니다,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이 실세이고 옹졸한 고집불통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후자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라고 말씀하신다.(눅18:14) 자신이 별로 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쪽으로 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아는 게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다. 팀켈러 목사님의 저서 <탕부하나님 중에서>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내 육신이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마음의 중심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겸손히 내 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리고 그 앞에 무릎꿇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의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신앙은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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