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를 진정으로 믿는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하는 성경을 만들고자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뽑아낸 구절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다.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의 진리가 어떤 개인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였다. 그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교훈을 가르치고 또 가르침 받았다.
그런 과정에서 약간의 왜곡이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이 진리라고 믿은 것은 사실상 진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아주 불충분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계시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와 복음주의적 신비가(神秘家)를 구분해야 한다고 믿는다.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는 "진리가 성경 안에 있으니 진리를 알기 원하면 신학자에게 가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의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요소를 보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의 이런 사고방식은 그 어떤 자유주의만큼이나 재빨리 기독교의 진리를 죽인다.!
그것도 더욱 교묘하고 치명적인 방법으로 죽인다.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시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식의 생각에 담긴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진리를 믿는 것과 관계있다. 진리인 것처럼 들리는 것을 믿기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 적절한 때에 올바른 말을 한다면, 누구나 그 어떤 것이라도 믿을 수 있게 된다.
둘째: 하나님 인식의 신비적 측면은 단순히 지성의 차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진리를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진리가 내 삶을 변화시키고 진리를 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포용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받아들여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내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왜곡하는 데 아주 능했다. 말씀을 얼마든지 자기들의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보통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이름 뒤에 몇개의 학위가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믿는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여러 해 동안 연구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오랜 세월 연구하고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완전히 다른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의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고,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메시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살아있는 진리를 경험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W 토저. 조건 없는 압도적인 사랑> 중에서 발췌.
'감동을 주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믿음에는 비난이 따른다 (2) | 2024.01.28 |
---|---|
마일즈 먼로의 "하나님의 가능성" (0) | 2024.01.17 |
그리스도의 지식 있는 사랑 (0) | 2024.01.06 |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 '죄'다 (0) | 2023.12.16 |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0) | 2023.1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