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동을 주는 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by 쏘울프랜드 2024. 3. 7.
반응형

예수님의 빈 무덤.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우리의 희망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는 자연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다양한 악이다. 과학은 인간악을 근절할 수 없고, 오히려 악한 목적에 쓸 도구를 늘릴 수 있다. 

 

여기서 '악'이란 유태인 대학살 같은 극악무도한 사건만이 아니라 평범한 불의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사리사욕을 좇는 기업,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 오만과 우월감, 부정직과 부패, 사회를 무너뜨리는 일상의 수많은 이기적 행위 등이다. 

 

암흑 같은 시기에 번성한 초기 기독교

첫 몇세기에 기독교가 놀랍도록 부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전염병이 로마 세계의 도시를 초토화하던 암흑 속에서도 희망의 원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고대 전염병을 연구한 역사가 '카일 하퍼는' 기독교가 그런 암담한 시기에 계속 성장하고 번성한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까지 긍정적 과정으로 보았다. 현세는 본래 덧없는 것이며 더 큰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을 더 큰 이야기, 우주적 이야기, 영원한 이야기 쪽으로 맞추는 것이었다. 

 

그들도 이 세상에 살며 고통을 경험하고 남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부름받은 대로 현세의 이야기를 그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최악의 역경조차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역사의 일부로 본다. 

그저  내세가 더 나을 거라는 타 종교의 막연한 가능성과는 달리 기독교의 희망과 소망은 막연한 내세가 아니라 우리 몸과 영혼이 부활하여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희망의 구심점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하나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희망을 잃은 세상에 기독교가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했고' 이제 "불 시험"까지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기에 우리 앞날의 희망의 근거는 과학 발전이나 사회 진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라고 상기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영혼 깊은 곳에 그 희망이 심긴다. 

베드로가 말한 '산소망'은 신약 성경에 따르면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 안에 영적 새 생명을 주시는데, 그 생명이 가진 필수 요소가 바로 희망이다. 

 

우리의 존재 속으로 희망이 녹아들어 이제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능히 맞설 수 있다. '산소망'이 되어 우리 안에 불처럼 타오르기 위한 첫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믿는 것이다. 

 

한 낱 상징으로서의 부활은 거의 무익하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우리만큼이나 부활을 믿기가 힘들었다. 고대 세계관과 현대 세계관은 공히 죽은 사람의 부활을 아예 불가능한 일로 본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아주 탄탄했다. 

그 증거는 당시 사람들이 지적 영역에서 내놓는 반론마다 답을 주었고, 이는 지금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부활을 액면 그래도 받아들인다 해서 저절로 그것이 우리의 "산 소망"이 되지는 않는다. 

 

부활이 실제 사건임을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활의 권능"(빌 3:10)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객관적인 부활의 사실을 아는 것과달리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은 직접 체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인데, 놀랍게도 여태 교회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내용은 많지 않다. 

 

십자가에 비해서 아주 가볍게 다루어지는 예수님의 부활.

많은 장로개혁 교단의 전형적 조직신학만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보다 십자가의 죽음에 훨씬 더 주목한다.

 

샘 올베리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고 부활절마다 그 믿음을 고백하지만, "남은 한 해 동안 사실상 그것을 도로 서랍에 처박아 둔다"면서 이는 "부활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 이라고 진단했다. 

 

"예수는......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같은 구절들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우리를 구원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제시하다가 구원받는 법을 설명할 때면, 온통 십자가 이야기만 하고 부활은 곁다리로 덧붙이거나 아예 생략해 버린다. 

 

십자가와 부활은 반드시 함께 있을때에만 우리의 현재 속에 역사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기한 마술이 아니라 침략이다. 우리를 구원한 사건,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그 사건은 이미 지금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속속들이 재창조한다. 

 

태초에 이 땅을 낙원이 되게 하셨던 그 임재가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에게 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덕분에 우리에게 실제로 임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그리스도와 성령은 둘 다 "첫 열매"(롬 8:23; 고전 15:20-23) 요 "보증"(엡 1:13-14; 고후 1:22; 5:5)이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힘의 위력"이 이제 우리 안에 있다. (엡1:19-20) 그래서 우리는 '새로 지으심을 받아'미래의 "빛"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즉 미래에 누릴 부활한 삶을 현재의 생활 방식에 접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재물과 권력을 보는 관점, 직장에서 일하는 태도, 성(性)과 인종과 정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 등이 모두 변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지금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갈" 기본 골격 내지 틀을 제시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대반전(The Great Reversal)이다. 그리스도는 약함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 권력을 내려놓고 패하신 듯 보이지만 사실은 승리하신다. 약하시기에 그 무력함을 통해 승리하신다. 

 

이 대반전은 "하나의 역동"이 되어 삶의 모든 영역 곧 "생활 리듬, 윤리, 세계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까지 확장된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 원리대로 살면 인간의 삶이 지금 여기서부터 새로워진다. 

 

부분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실재다. 새로운 창조세계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실존인데, 이는 맹신과 냉소를 둘 다 배격한다. 이상주의와 패배주의를 둘 다 날려 버린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 중에서 발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