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지혜롭고, 올바르며, 선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이 명령이며 감정은 명령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웃을 좋아하라든지 따뜻한 마음으로 애정을 품고 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지시할 뿐이며 이것은 주로 일련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좋아하는 감정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일면이며 사랑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다. 따뜻한 마음과 행동이 내면에서 하나로 통합될 때 기쁨으로 누군가를 섬길 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감정과 행위를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
감정과 행위를 구분해야 하는 까닭은 감정이라는 것이 도무지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복잡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이 작용할 때마다 널을 뛰기 십상이다.
불길이 속구쳤다가 이내 사그라진다. 갑작스럽게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지만 행동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죄도 아니고 미덕도 아니다. 음식이나 음악에 대한 기호와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다.
현대 문화가 부추키는 대로 사랑을 '좋아하는 느낌'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러니까 강렬한 느낌을 주는 행동만을 '진짜배기'사랑으로 여긴다면 누구나 나쁜 친구, 더 나아가 끔찍한 가족이나 배우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감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를 예로 들면, 아이가 특별히 예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하루 정도 휴가를 내고 아이를 야구장에 데려가 즐겁게 해주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애정이 가득한 경우보다 사랑이 훨씬 더 깊다고 보아야 한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상대인 경우, 필요를 채워주고 감사와 애정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이편의 에고 역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파트너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마음보다는 스스로 사랑을 받고 만족을 얻으려는 욕구를 좇아 움직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감정이 먼저 뜨거워진 뒤에야 사랑의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우면 지혜롭게 사랑하기 어렵다.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을 때 오히려 진실하고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다.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들을 망쳐놓기 쉽다. 남편과 아내도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서로를 망가트릴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까닭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서로고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파트너가 화를 내거나 거친 말을 쏟아내는 상황이 왔을 때 이편 또한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를 진정으로 아끼고 그의 유익을 지켜줄 마음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사랑의 느낌이 없을 때 도리어 진실하고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다.
느낌보다는 행동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정의할 때 남을 위하는 행동보다 애틋한 감정에 비중을 두면, 사랑하는 관계를 든든히 지키고 성장시키는 동력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반면에 느낌보다 행동 쪽에 방점을 찍으면 외려 감정이 솟아나고 더 깊어지게 된다. 비단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생기를 찾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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